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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11월-함석헌의 민족정신과 우찌무라간죠/김치홍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바보새 작성일16-07-18 17:26 조회125회 댓글0건

본문

2002년 11.9  기독교회관 4층 406호
함석헌의 민족정신과 우찌무라간죠/김치홍


그 사람  -  咸錫憲과 內村鑑三


1. 사람은 몇 사람 만나고 세상을 지나간다. 나는 <그 사람을 가졌는가>, 겨울 나무처럼 기다려 본다.
  길 나서는 날 처자를 맡기고, 외로울 때 "저 맘이야"하고,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저만은 살려 두거라"일러줄, 세상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할,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그 사람을?

2. 나는 감히 오늘 다시 <水平線너머> 그 사람을 본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만난 咸錫憲님, 물 건너 無敎會의 內村鑑三님, 두 분의 그리운 모습이다. 

3. 內村鑑三의 信仰性格과 無敎會主義

 3. 1. 內村의 信仰性格

內村鑑三의 信仰性格은, 좌절을 통해서 體得하는 신앙, 經驗主義에 의한 신앙. [事實信仰]이라고 평가를 하고 있으나, 그 시대를 制約하고 있던 絶對主義的 사고나, 精神的態度로부터 과감히 벗어나 贖罪信仰. 復活信仰. 再臨信仰으로 自己信仰의 內實을 추구하였다. 그의 성서에 관한 지식은 결코 新知識的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저서는 일본어로 표현한 信仰體驗그 자체이었다.
內村는 十字架의 贖罪는 信仰에 의하여 義롭게 되는 體驗을 기술하고 있다. 信仰體驗을 [實驗信仰] 또는 [事實信仰]이라고 하였으며. 新約聖書 요한복음을 통하여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만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을 간직하지 못할 것이다.(요6:53.)라는 구절의 이해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기독교는 道義學이 아니며 生物學이고, 道德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生命을 줌으로 살게 하고, 그리스도는 敎師가 아니며 生命이다." (1905.明.38.2.日記). 라고 生物學的 實驗信仰이라 했다.
 또 로마서를 통하여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 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남습니다."
(1)(롬8:36-37)는 구절을 인용하여, 基督信徒의 實驗信仰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實驗이라는 것은 人間內面에 일어나는 事實로 聖靈을 받은 新生命의 生物學的事實을 주장함으로(1903.明36.1.日記), 다시 生物學的 實驗信仰을 강조하고 있다.

內村는 日本近代精神의 限界를 극복하는 신앙으로서, 미신을 버리고 義의 잣대로 封建主義와 道德主義를 벗어나려고 하였다. 그의 생활은 평범한 중산계급의 시민 생활이었으나, 그의 사상과 신앙은 超階級的인 기독교 신앙이었다. 그는 인간을 구원하지 않고는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없고, 사회를 잘 하면 인간이 잘 된다는 생각으로, 社會變革의 단계로 社會的實踐과 絶對主義와 대결은 피할 수 없었다.
 위와 같이 內村의 信仰實驗(體驗)은 그의 信仰性格을 형성하게 되고, 贖罪信仰, 復活信仰, 再臨信仰, 나아가 反戰, 美國에 抗議등 사회의 現實問題에 대하여 信仰的(2)<經驗主義的信仰>위치에서 인생의 고민과 함께 피나는 고통으로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3. 2. 後繼者問題와 無敎會主義

內村는 死後의 그의 사상과 신앙의 後繼者를 두지 않고, 集會解散, <聖書의 硏究>誌의 폐간, 無敎會등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畔上賢造는 1933년 內村記念講演<內村先生の遺したもの>에서, 內村가 1925년 3월에 발언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선생은 一同을 향하여, 사후의 잡지의 폐간과 집회의 해산을 최후로 확정한 것에 관하여 발표하고, 결코 違背하는 일이 없도록 注文을 하셨다.
座中은 선생의 명확한 決意를 듣고, 그 嚴肅한 분위기에 말없이 수궁 했다." (3) 라고 했다. 
 石原兵永의 요약은 보면 ' 聖書硏究會(柏木聖書硏究會)는 內村의 사후 먼저 해산하고, 內村의 이름으로 모여서는 되지 않는다. 우리의 신앙은 쯔윙그리流派이며 組合主義(Congregational)이기에, 2. 3명이 모이고, 그 곳에 主가 계신다. 制度的敎會(Establisthed    church)는 갖지 않는다.(4)라고 했고, 1928. 2. 23.일기(5)에는 集會解散과 雜誌廢刊을 최후적 결정으로 기록되어 있다.

1916년, 後繼者問題에 대하여는 '內村자신이 후계자를 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는 神의 뜻에 맡기는 것이고, 우리는 神의 종으로 후계자 때문에 걱정 할 필요가 없다. 진실한 후계자는 우리가 모르는 사람 중에 있기에, 우리가 결정하는 후계자는 도리어 우리들의 主義나 精神을 더럽힌다.'(6)라 했다. 같은 해<內村先生의 預言>(7) -石原兵永에게 발표하라는- 에도 기록이 있다.

1923년 4월 24일<日日の生涯>를 보면은, '철학자 라이프니쯔를 읽었다. 위안을 받은 것은 철학자는 敎會를 일으키지 않고, 弟子를 만들지 않고, 眞理를 찾고, 永生을 확신하고 그것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이점은 종교가에게서 아니라, 철학자에게서 배웠다. 후계자는 神이 일으키시고, 사람의 計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8)

같은 해 7월 2일의 기사에는 '나는 뒷일을 모른다. 그것으로 족하다. 나는 眞理만 논하고 그 다음은 神에게 一切를 맡긴다. 후계자가 나온다 해도 나의 신앙과 주의를 계속한다고 할 수 없다. 루터나 웨슬레의 후계자가 선생과는 아주 反對되는 신앙을 외쳤다. "내일 일을 걱정 말라." 죽은 뒤의 걱정을 말라.' 라고 했다.
1929년 10월15일 다음과 같은 기사에도 . '無敎會에 나의 생애의 사업을 추진한다. 자기의 교회를 남기지 않으며, 물론 후계자도 만들지 않고, 眞理에만  따라간다.'(9)라고 했다.

위와 같이 內村는 후계자와 무교회에 관하여 명확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는 것 같았다. 畔上의 <內村の遺したもの>(10)에는, '그러나 內村가 결정  하기까지는 상당히 고충이 있었다고 생각지 않으면 안 된다. 하루는 集會의 繼續과 雜誌의 繼續에 관해서, 한 방법으로 ,농담 같이, "集會는 塚本에게, 雜誌는 畔上에게 물려준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고 기술하고 있다.  塚本의 妹에게도 "會堂은 오빠의 것이 된다"고 했다.
                                   

塚本虎二 自身도 다음과 같이 '分離問題가 나오면, 內村의 생각은 時計錘처럼 흔들렸다. 講堂은 너에게 물려준다고 말하기도 하고, 分離해야 된다고 하기도 하고, 雜誌問題도 망서렸다.'(11) 고 하였다.

이상과 같이 內村은 이론상 확신하고 있던 集會解散과 雜誌廢刊는, 현실 처리 과정에서는 苦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集會解散은 제자들과의 인연을 끊어 버리는 苦惱도 있었다. 그러나 集會와 雜誌를 훌륭하게 처리를 했다. 
1930년 3월 31일 靜子夫人, 祐之博士, 藤本博士, 石原兵永 4사람은 豫言寺에 모여 논의하고, 內村의 精神따라서 의견은 완전히 일치하였다. "先生の永眠とともに內村聖書硏究會解散し,聖書之硏究誌廢刊する"(12)라고 결정하고, 1930년 4월 6일<內村聖書硏究會>는 解散되고, 4월말에 <聖書之硏究>는 終刊 를 간행하고 廢刊했다.

<聖書硏究會>解散과 <聖書之硏究>廢刊에 과하여 內村은 다음과 같은 결심을 했다.
'1918. 12. 9. - 일생 敎會堂을 가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교회당을 가지면 나의 신앙은 굳어진다(固結). 신앙은 자유롭게 流動的이라야 한다. 고로 大宗敎家는 會堂을 가지지 않았다.  法然, 親랑, 日蓮등. 會堂建築을 위하여 數千圓을 寄附者에게 돌려주어 마음이 편하였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하늘 나라의 자녀요 가라지는 악한자의 자녀를 말하는 것이다."(마13:38) 會堂이 있으면 나무의 그림자이며, 푸른 하늘 밑의 綠野이고, 敎會堂은 傳道에 방해가 된다. '(13)

今井館聖書講堂은 남았다. 今井館은 內村가 없이, 그리스도가 중심인 友人들의 집회가 5년간 계속 되었으나, '1935. 1. 23.內村祐之氏는 12명의 門弟에게 '講堂은 福音위하여 사용하자. 預言寺(日本家屋)매매하여 일부는 內村家, 일부는 講堂에 쓰자. 本家는 祐之夫妻가 의논하여 결정하도록' (14) 라고 內村의 유언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날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祐之氏는 12명의 委員을 지명하여, 2. 12.에 會合에 따라 講堂은 藤本武平二, 齊藤宗次郞이 의논하여 敎友會가 인수토록 하고 內村의 住宅인 本屋은 山 儀市가 매입하여 逗子에 옮겼다.

이상의 과정을 거처 內村의 集會解散, <聖書之硏究>誌廢刊, 會堂을 남기지 않는다는 3가지방침을 관철한 것인지, 畔上賢造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今井館附屬柏木聖書講堂은 완전히 소멸되고, 그 古材木를 받아 東京敎友會의 講堂이 어딘가에 세우도록 되었다. 그 책임은 東京敎友의 책임이다.'(15) 오늘날 目黑區高根町에 남은 今井館聖書講堂이며, 內村의 形見. 遺品이며, 이것을 聖物視함으로, 이러한 利便이 되는 영향은, 弟子들의 責任이 된 것이다.破壞하여 남기지 않는 것에 능가하는 것은 없다.   

1935년 1월 23일 會合에서 山 まりこ는<福音을 위하여... 傳道를 위하여 쓰자>라는 견해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內村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速達이 와서 만나니 '今井館을 어떻게 할지 망서린다. 내가 죽으면 누가 傳道用으로 활용해 줄 사람이 있을까. 내가 대답을 하니, 그것을 헐어 버리지 않아도 되나,  福音傳道가 아니라 술집으로 쓰이면 건물을 불태워 버리라.' (16)                         

政池는 1963년 8월호(17)에 ' 今井館聖書講堂은 敎友會의 전도, 矢內原忠雄의 집회등 전도를 위하여 유효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후에도 今井館은 유효하게 활용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集會解散, 雜誌廢刊의 정신이 貫徹한 것인가. 內村에게는 責任이 없다. 책임은 弟子들의 문제이다. 遺物은 없는 편이 좋다.

無敎會라는 것은 組織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교회 문제에 있어서는 조직이라는 것은 制度를 意味하는 것이다. 조직이라는 것은 集會의 社會的性格이라고 하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였다. 무교회는 제도뿐만 아니라 建物이라는 物的인 것조차 남기지 않음으로써, 철저하게 自己의 정신을 貫徹할 수 있다는 것이다.
內村의 죽음으로 雜誌는 廢刊, 集會는 解散, 小集團으로 分散, 各小集團는 獨自의 誓約集團으로, 制度化, 實體化로부터 탈출 할 수가 있다. 무교회주의는 官僚化로부터 벗어난 組織論를 가짐으로, 自身을 反省할 수 있다. 무교회주의는 自身을 내어 던지고, 對象化하는 것만이 可能하다. 그렇지 않고 自己陶醉에 빠지는 일이 있으면, 그것은 큰 문제이다.

4. 咸錫憲님의 기독교(예수)와 韓國(JK), 內村鑑三님의 기독교(예수)와 日本(JJ)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역사와 고난의 시대에 그 실제를 체험하며, 豫言的愛國者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咸錫憲님의 경우는 軍事政權하에 더욱 비참한 현실에 직면한다.
두 분은 각각 <聖書朝鮮>과 <聖書之硏究>를 발간, 폐간의 쓰라린 아픔을 경험했다.   
두 분은 기독교와 사회주의와의 갈등 속에서, 사회주의의 비기독교적인 것을 수용 할 수가 없어, 사회주의에 동의 할 수가 없었다.
이외에도 信仰體驗, 신앙의 과학적인 이해, 개인과 사회문제, 주체적인 신앙, 가난의 체험,義를 위한 행동, 集會解散, 無敎會, 苦難의 종으로 몸소 본을 보인 그리스도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나는 이사야 53장 2 절 - 7절의 말씀으로, 수필 같은 이야기를 마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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